최초 '여성 대통령', 최초 '부녀 대통령'에서 최초 '탄핵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4일 청와대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 후 인사하고 있다. <출처=포커스뉴스>

[한국정책신문=김희주 기자]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23분경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선고 재판에서 이같이 선고하며, 재판관 8명 전원이 '파면'을 결정했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되면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박 전 대통령의 '최초' 타이틀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3년 2월 25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의 독신 대통령이자 87년 체제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으로 기록되며 대통령직에 올랐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지난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5년간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아 왔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집권여당 후보를 꺾고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박 전 대통령은 부총재 시절이던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가 자신이 내놓은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 당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 총재가 개혁안을 대폭 수용하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재합류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여당 후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박 전 대통령에게는 기회가 됐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둔 3월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 뽑혔고, 121석을 얻어 그 공을 인정 받아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대표 재임 2년 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보수정당을 살려낸 구세주,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이같은 화려한 정치 경력은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발판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후보에 패해 비주류로 밀렸으나, 2011년 말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면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 152석을 확보했다.

이어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84%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87년 체제 이후 최초로 과반 득표한 대통령으로 18대 대통령이 됐다.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한국 최초의 독신 대통령, 최초의 여성 태통령,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란 타이틀과 함께 보수 및 5~60대 지지층, 영남에서 나오는 '콘크리트' 지지를 받으며 야심차게 출범했다.

그러나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댓글 조적 사건'을 시작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이듬해에는 '메르스 사태'로 정권의 신뢰가 흔들리더니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임 중 헌정 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피의자로 입건되기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탄핵을 당하며, 최초 '탄핵 대통령'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참담한 결말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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